장의업의 개혁을 위하여- 김실장의 작은 전쟁

김석제( 서울중앙병원 의전실 실장)

 

“의전실이라는 명칭이 좀 생소하죠? 예전처럼 쉽게 이야기하면 곧 장의업이죠. 시신을 다루는 장의사... 물론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죠. “ 현재 서울 중앙 병원 의전실에 근무하고 있으며, 문제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나라 장례 문화에 일찍이 유례가 없는 뒷거래 없는 깨끗한 장례문화를 선포해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델링 케이스로 손꼽히는 영안실 운영을 가능케 한 주인공. 올해 46세의 김석제씨. 그는 1971년 재단 이사장님 소개로 신세계 공원 묘원에 사환으로 입사한 이래 지난 30여 년간 이 분야 (장례업)에 몸담아왔다.

 

지난 날 어려움이 많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 85년경으로 기억되는데 내가 서울 성가병원에 있을 때, 직원 중에 총각이 2명 있었어요. 그중 한 명이 당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청년이 처가 될 집에 병원 원무과에 근무한다고 얘기했나 봐요. 물론 영안실 업무가 원무과 소속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설마 시신을 다루는 장례 업무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죠. 그런데 우연히 그 처가 집에서 병원으로 전화를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원무과에 전화가 걸려 오고 원무과에선 이름을 묻고 결국 전화는 연결 연결돼 영안실까지 연결되고 사실이 알려지게 된 거죠. 신부측에선 부모들이 송장 만지는 사람이라고 결사 반대했고 잘 진행되던 결혼은 그 뒤로 말 그대로 풍지박산 났죠. 사실 지금도 사회적으로 이런 직업을 갖는 사람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은 여전합니다. 이 때문에 저도 몇 년 전까진 어디를 가도 그냥 병원에 근무한다고 말했어요. 나 또한 몇 번이나 이 일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포기하려고도 했구요. 왜냐면 아이들은 계속 자라나고 내 스스로도 직업에 대한 떳떳함이 없었으니까요... 어디 가서 명함하나 제대로 낼 수가 있나.. 그래서 스포츠 용품점이나 하나 내서 살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죠.

 

“ 하지만 그가 실제 고민한 문제는 이보다 근본적인데 있었다. 즉 우리 나라 장례업계 전반에 팽배해 있는 음성적인 뒷거래... 물론 그는 나름대로 문제점과 해결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은 돈이 있고 그는 기술은 있는데 돈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방식대로 운영할 수도 없었고, 요구조건을 내더라도 들어주지도 않았다. 당시 현대 쪽에선 그에게 3번 정도의 제의를 해왔다. 그는 거절했다. 문제가 많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곧 직원들의 복지제도가 없는 상황에선 현실적으로 영안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바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접촉 끝에 병원 측에선 직원들의 복지를 인정해 주기로 했고 95년 2월 7일 그는 중앙병원에 부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업계에 몸을 담은 후 느꼈던 문제점들을 정리해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개인적으로 1,2,3단계의 체계적인 방안을 잡았다. 첫 번째 단계는 장의업이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전문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사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진짜 슬픔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직원들, 그 자신들부터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상대로 노자 돈을 요구하는 행위부터 없애야 했다. 결국 세상의 색안경을 끼고 보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단계로 우선은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그는 나름대로 서서히 실천에 옮겨갔다.

 

“ 우선 전 직원들 교육을 통해 단 돈 10원이라도 음성적으로 받지 않을 것을 서약케 했습니다. 대신 지금까지 받은 실제 수입을 솔직히 말하라고 했죠. 그 부분에 대해 봉급으로 책정해 주겠다구요... 그랬더니 받은 액수가 천차만별이었다. 100만원 대에서 200만원 대까지 있었어요. 물론 이 액수에는 원래 책정돼 있던 호봉표에 맞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전 별도로 호봉표를 만들어 올렸죠. 직원가족에 대한 학자금, 체력단련비등.. 기존의 수입을 보장해 주었고 연차, 월차, 교대근무를 통해 근무여건을 개선해 주었어요. 그래서지금은 모든 면에서 병원재단과 대우가 똑 같습니다. 대신 뒷돈을 절대 받지 않기로 각서를 쓰게 했죠. 그런데 사람은 앉으면 눕고 싶다고... 이렇게 까지 보장을 해 주는데 월급은 월급대로 받고 지하에서 주는 돈은 또 받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결국 전 받은 사실이 밝혀진 7명의 직원을 해고 시켰습니다. 남은 직원들은 받으면 짤리고 안 받자니 주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하지만 설마하던 직원들도 정말 해고되는 걸 보자 그 뒤론 간혹 있던 뒤거래도 없어지기 시작했고 이젠 전혀 없습니다.

 

“ 공식 봉급을 받는다는 건 이 분야에선 이전엔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개혁이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 장의업에 새로운 발로였다.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가 겪은 지난 시간 어려움이야 어떻게 다 얘기할 수 있을까? “ 한번은 유족들이 고맙다며 돈을 찔러 줬나봐요. 직원들은 교육 받은 대로 주는 돈을 받으면 짤린다고 거절했겠죠. 그러자 유족들은 액수가 적은 줄 알고 더 주더래요. 직원들이 얼마나 아까왔겠어요. 제 원망도 많이 했겠죠. 그래서 그래도 받으면 짤린다고 하자 누구냐고 물었나 봐요. 전 그때 제 방에 있었는데 유족중 한 명이 술이 약간 취한 상태로 방문을 걷어 차며 들어오더라구요. 그리곤 대뜸 <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실장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 하더니 < 내가 우리 아버지 잘 모셔줘서 술이나 한잔하라고 했는데 누가 짤라!” > 전 사태를 파악했죠. 그래서 일단은 그 사람을 진정시키고 앉아서 차근차근 설명해 갔습니다. 현재 장의업계의 바가지, 폭리, 뒷돈 문제등을 개선하자는 취지라구요. 그리고 이 문제의 근본은 장의업계만의 문제가 아닌 살아서의 불효를 죽어서 돈으로 만해해 보려고 하는 대다수의 국민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전체에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구요. 그래서 전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서류와 조사한 것을 하나 하나 보여주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얘기했습니다.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얘기를 하는 중에 그 분은 나에게 사과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하죠.

 

“ 지금은 서울중앙병원이 나름대로 뒷거래 없는 깨끗한 병원이라고 소문도 나고 해서 그런 일이 적지만 김석제씨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당시만해도 현장에서 부딪치는 이런 일뿐 아니라 실제 많은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관행화된 뒷돈 거래를 없애는데 있어 다른 병원의 업자들에게 많은 협박전화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욕설을 듣기도 했다. “

 

한번은 출근을 해서 전화를 받았는데 < 야, 김석제 이 새끼! 너 혼자 잘났고, 너 혼자 깨끗하냐? 너 오늘 죽어! 올림픽 대교에서 죽을 줄 알아...> 얘기하곤 그냥 끊어 버리는 거예요. 이러한 공갈 협박에 2년을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95-97년, 2년간의 기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길고 힘든 시간이었어요. 지금은 다른 병원은 모르겠지만 서울 중앙병원 만큼은 처음에 계획했던 1단계는 실현되었다고 봅니다.

 

“ 김석제씨가 우리 나라 장례업의 발전을 위해 점진적으로 생각하는 두번째 계획은 고객에 대한 친절과 충분한 서비스다. 이건 직원들의 교육을 통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고 믿고 맡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특수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차원에서 특수 봉사료를 공식적으 로 채택하는 것이다. 사실 이 일은 의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가장 가깝지만 막상 사랑하는 가족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곧 이 일을 아무나 할 수도 없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호텔처럼 공식 화된 서비스 요금을 받는 것이다. “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까 이제 2, 3단계도 보여드릴 시간이 있겠죠. 저희 아이들도 여기에 왔었어요. 그리고 아빠가 남들이 안 하는 이일을 통해 봉사하고 있다는걸 보여줬죠. 이젠 아이들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