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아름다운 선택

고 김연수 선생(전 삼양사 창립자)/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한동안 우리 나라는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었다고 흥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IMF 체제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환상이었음이 드러났고 우리의 진짜 실력과 분수를 깨닫게 되었다.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도사리고 있는 불합리와 모순점들이 나타나고 있고 엄청난 시련과 고통 속에 개혁과 구조조정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장묘문화개혁운동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각 나라별로 역사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 장묘제도가 다른데 우리 나라는 수백 년에 걸쳐 매장문화가 주류를 이루어왔다. 그러다 보니 현재 묘지의 총 면적이 공장부지 총면적의 3배나 되고 매년 여의도 크기의 땅이 묘지로 바뀌고 있다. 가뜩이나 가용 국토 면적이 좁고 인구가 많은 우리 나라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동안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전통과 관습의 높은 벽에 부딪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몇몇 시민단체와 뜻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화장유언 남기기 운동'이 시작되고 故 최종현 회장이 화장의 유지를 남기면서 매장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크게 확산되었다. 장묘문화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묘지를 쓰지 않음으로써 국토의 낭비를 줄이자는 것인데 그 전단계로 화장을 꺼리는 국민들의 국민의식이 급선무라 하겠다. 화장을 꺼리는 이유로는 장례를 보다 호화롭고 격식을 갖추어 치르려는 전통적인 효 사상과 화장에 필요한 시설의 불비나 절차의 번잡함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화장이 편리하고 깔끔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관련시설을 확충. 개선하고 보다 검소한 장례문화를 유도해 나가는 노력을 함께 전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장묘문화개혁운동과 연을 맺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도 취지에 공감할 뿐더러 선친의 유지를 받드는데도 그 이유가 있다. 1979년 향년 83세로 타계하신 선친 秀堂 김연수(金秊洙)는 당시 사회지도층으로서는 예가 드물게 화장을 택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9년전인 1970년 타계하신 필자의 모친을 먼저 화장으로 보내드렸다. 온 나라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 경제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적쟎은 고민과 번민을 겪고 있음이 사실인데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필자는 항상 선친을 떠올린다. 그 어르신이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었지만 매사를 행동으로 솔선수범 하셨던 '나의 아버지', '나의 영원한 스승'을 한번 더듬어 회상함으로써 비단 장묘문화개혁 뿐 아니라 난세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구해보고자 한다.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의 秀堂은 한마디로 미래를 앞서서 살아가신 분이셨다. 매사를 미리 생각하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충분히 하고 나면 과감히 실행에 옮기셨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실 때가 많았는데 때로는 아주 작은 것에 세심한 배려를, 때로는 아주 큰일에 대범한 처신을 하셔서 그 수의 깊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인으로서의 秀堂은 손꼽히는 재력가임에도 불구하고 찬을 셋이상 올리지 않는 검소함과 지위 고하를 떠나 누구에게도 자세를 낮추는 겸손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기업가로서의 秀堂은 가히 선각적 인물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순수 우리자본으로 경방과 삼양사를 일으켜 키웠고 만주에서 대단위 농장과 방직공장을 경영함으로써 유낭의 길에 올랐던 우리 동포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셨다. 세월이 지난 오늘 되돌아보면 당시로선 모두 개척자적 행동이었고 그러한 면모는 또 다른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간척사업을 통해 서해안의 지도를 바꾸었고,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던 울산에 제당공장을 세움으로써 오늘날 공업도시 울산의 터전이 되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주에 폴리에스텔 공장을 세운 것도 특유의 헤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기업가로서 시대를 앞서갔던 秀堂의 면모는 사생활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장의 선택이다. 秀堂이 화장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돌아가시기 십수년전의 일이다. 주위에서 눈치를 챈 것이 그러하니 실제 마음에 두신 것은 그 훨씬 전이라 하겠다. 언제부터인가 일본 출장길에 화장과 관련된 책자나 자료들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는데 모두 당신이 손수 구하셨다. 한동안 열심히 읽으시고 또 일본 가는 길에 현장을 답사하시곤 하시더니 결심이 선 듯 의지를 밝히셨다. 먼저 어머님께 동의를 구하셨다. 그러나 화장은 무연고의 행려병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기에 어머님은 반대를 하셨다. 우리도 어머님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아버님은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고 서두르지 않고 어머님을 설득해 나가셨다. 결국 어머님도 돌아가시기 반년전 쯤에는 승낙하셨고 간소한 화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당시 화장터는 홍제동에 있었는데 그 시설이 초라하고 옹색했던 데다 화장 자체가 낯설어 화구에 어체를 모실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정작 아버님은 그로부터 9년뒤인 1979年 영면에 드셨는데 그때는 한번 경험도 있고 오랜 마음의 준비가 있어 충격이 덜했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우리 나라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화장으로 葬禮를 치를 날이 꼭 올거야. 또 머지않은 장래에 法으로 정해질 거야. 지금 우리 국토는 인구에 비해 너무 협소하여 산사람의 주거지도 모자라는 형편이야. 산사람은 一家口에 여러 사람이 동거하는 데 죽은 사람은 一人 一墓나 기껏해야 夫婦合葬이 원칙이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住宅難 이상으로 墓地難이 올거야.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려는 惡習이 있어 폐단이 많고 경제적인 낭비도 대단히 많거든. 사람이 죽으면 어차피 다 흙이 되는 건데 왜들 그렇게 화장을 꺼리는지 모르겠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화장하는 것이 깨끗하고 편리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러니 우리 부모된 사람들이 아들, 딸들이 염려하고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미리부터 화장으로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遺言하는 것이 부모로써 취할 도리라고 생각하네' (秀堂傳記中 발췌) 秀堂이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하시던 말씀이다.

 

秀堂이 화장을 생각하신 이유는 두 가지 였던 것 같다. 우선 좁은 땅덩어리에 묘가 많아져 국토의 낭비가 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례문화의 허례허식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백일 탈상을 준수해왔고 장례도 가족장으로 검소하게 치를 것을 미리 유언해 놓기까지 했었다. 번거로운 사회의례준칙을 간소화하는데 솔선했던 것인데 최근 나타나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이미 20∼30년전에 정확히 내다보셨던 것이다. 게다가 유교문화권인 우리 나라에서 자식들이 먼저 화장운운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자식들의 입장까지도 먼저 헤아려 주신 것이다. 冒頭에서도 잠깐 언급했으나 秀堂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매사를 10년, 길게는 백년 앞을 내다보고 결단을 내리셨다. 또한 내 입장만이 아닌 국가, 사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무척 중히 여기셨다. 화장을 결심하기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나 그것이 단순한 당신 개인의 장례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충분히 고려하시고 사회 지도층으로써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 秀堂의 후손으로서, 인생의 후배로서 항상 부끄럽고 부족함을 느낀다. 더구나 작금의 국가경제 위기상황을 맞아 경제계에 줄곧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秀堂의 솔선수범과 실천의 자세가 사회 곳곳에 퍼져나가 작게는 장묘문화의 개혁에 일조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의식개혁과 경제 위기극복에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