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의 기분 좋게 나이들기]살아 있는 장례식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벌써 10년도 넘은 오래 전의 일이다. 매사에 매우 똑똑하고 이성적인 선배의 아버지가 상당히 오래 편찮으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선배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하여 당시만 해도 아직 부모상을 당한 경험이 없던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나는 평소에 그리도 똑똑한 선배가 일흔 살이 넘은 노인이 많이 아프시면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인지, 나는 내가 직접 부모님의 상을 당했을 때에야 실감했다. 부모님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화는 죽음에 관한 한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치고, 또 알고 싶어하며 스스로 배우는 자세를 갖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러스트·박향미>


그런 점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우연히 알게 된 일본의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나온 에르프라는 늙은 개에 관한 글은 참 놀라웠고 또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이것은 한스 윌리암이라는 독일 작가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서 에르프라는 개를 통해서 나이 듦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글의 제목은 ‘에르프, 너를 매우 사랑한단다’이며, 내용은 주인공 ‘나’가 아기 때부터 같이 자라온 강아지 에르프와 같이 놀면서 매일 밤 “에르프, 너를 매우 사랑한단다” 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형이나 동생도 에르프를 좋아했지만, 나와는 달리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나의 키가 점점 커짐에 따라 에르프는 뚱뚱해지더니 점점 잠이 많아졌고, 산책하는 걸 싫어하게 되었다. 걱정이 되어 수의사에게 데리고 갔더니 수의사는 “에르프는 나이를 먹었단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에르프는 계단조차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에르프를 방에 데리고 자면서 부드럽게 팔 배게를 해주고는, 자기 전에 반드시 “에르프, 너를 매우 사랑한단다”하고 말해 준다. 에르프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그러던 어느 아침 눈을 떠보니 에르프가 죽어 있었다. 밤 사이에 죽은 것이었다. 나와 형제들은 울면서 에르프를 정원에 묻었다. 그런데 나는 말할 수 없이 슬프면서도 형이나 동생보다는 슬픔의 정도가 덜했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형이나 동생에 비해 나는 매일 밤 에르프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아직은 다른 개를 키울 생각이 없지만,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른 개를 기를 때에도 나는 매일 밤 너를 매우 사랑한단다 라고 말해줄 것이다.”

죽음이란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의 불꽃이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맞이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와 누구보다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죽음에 대한 얘기는 거의 나누지 못했고, 다시 만나자는 인사마저 차마 하지 못했던,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할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야만 한다.

나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1학년의 어린 학생들에게 인간의 늙어가는 과정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관해 가르치고 준비하게 한다는 발상이 놀라웠다. 그리고 개를 통해서 죽음을 가르친다는 방법론은 가족의 죽음을 직접 다루는 것보다 덜 슬퍼서 좋았다.

그러니 우리도 친척이나 주변의 돌아가시는 분이 생길 때, 혹은 죽음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마다 가족끼리,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해 말하고 가르친다는 C씨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메리 파이퍼(Mary Phiper)는 특히 노인 부모와 헤어질 때는 작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충고한다. 작별 인사가 남기는 여운은 좋은 느낌이든 나쁜 느낌이든 오래 남는다는 것. 작별을 잘하는 것은 헤어지기 힘든 순간을 구원해줄 수도 있으며,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따스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살아있는 장례식’도 좋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유명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교수는 대학의 동료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자 장례식에 참석하고는 낙심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멋진 말을 해주는데 정작 주인공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하니 말야.”

그리곤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이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모리교수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모리교수에게 경의를 표시했고, 그리고 모리교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소에 말하지 못한 가슴 벅찬 이야기를 전부 했다. 모리교수는 말한다. 죽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도 모리교수의 말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살아있는 장례식을 연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아니, 무슨 거창한 ‘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얼마나 다행하고도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만남 자체가 살아있는 장례식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를 그들이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바로 지금,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여성신문 726호 2003-05-09 오후 3: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