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이씨 분파도

 

執義公 (모)
집의공은 6세조 정당공 인범(仁範)의 장남으로 생졸년 등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1376년 병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 파주시 분수원(分修院)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失傳) 되었다.

단소를 경기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손자인 사정공 양경(良卿) 묘소 위쪽에 건립하였다.

高敞公 (의수)
고창공은 9세 온양공 추(抽)의 장남으로 생졸년 등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7세 춘당공(揚)의 장손이다.

1459년 진사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처 고창현감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증조부 춘당공(揚) 묘하에 있다.


僉正公 (총)
첨정공은 10세 홍산공 의석(宜碩)의 장남으로 생졸년을 알지 못한다.

1484년 진사가 되었고, 무과에 급제한 후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실전 되다가 1987년 4월 2일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 남록 홍산공 묘하에 개봉축 하였다.


主薄公 (진)

공은 10세 홍산공(휘:宜碩)의 차남으로 생졸년 등 다른 인적사항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議政公 (경민)

의정공은 1578년생으로 11세 해풍군 증손인 순천공 통(通)의 차남으로 승지공 적(適)에게 입양되었다.

 

1613년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처 통정대부 백천군수 해주진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652년 7월 9일 별세하니 수 75세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증직되었다.


直長公 (원겸)

직장공은 1503년생으로 11세 수사공 울의 차남으로 제용감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별세 년도등 그 외 사항은 알지 못한다.

 

묘소는 경기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선친인 수사공 울 묘하에 있다.


部將公 (원순)

부장공은 1505년(乙丑)생으로 11世 수사공(휘)의 삼남으로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별세 년도 및 묘소는 전해지지 않는다.


竹谷公 (선)

죽곡공은 1524년 12세 감찰공 원수(元秀)의 장남으로 1564년 생원이 되어 남부참봉을 역임하였다.

 

1570년 8월 22일 별세하니 향년 47세이다.

 

묘소는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5번지에 있다.


定齋公 (번)
www.duksoolee.com

정재공은 1531년 12세 감찰공 원수(元秀)의 차남으로 통덕랑을 제수 받았으나 은덕불사(隱德不仕)하였다.

 

1590년 10월 15일 별세하니 향년 63세이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도촌 서당골)에 있다.


文成公 (이)

문성공은 1536년 12월 26일 12세 감찰공 원수(元秀)의 삼남으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다.

 

1548년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564년 생원, 진사에 장원 한 후, 동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8년 봄 예안의 도산으로 이황(李滉) 선생을 방문하였고,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하여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 및 시험에 장원하여 구도 장원공(九度壯元公) 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후 예조좌랑, 1568년 이조좌랑 재임 중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9년 교리 재임 중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으며 1572년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고,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된 후 만언봉사를 올렸으며, 1575년 황해감사, 부제학 재임 중 성학집요를 제진하였다. 1576년 격몽요결을 지었고, 1580년 기자실기를 편찬하였다.

 

1581년 호조판서, 대제학, 1583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과 학교모범을 지었으며, 우찬성 겸 지경연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시무육조를 개진하고 십만 양병을 주청하였다.

 

청백리(淸白吏)로 선록되었다. 1584년 1월 16일 별세하니 향년 49세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증직 되었고 명부조 (命不祚) 되었으며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1682년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경향각지 15개소의 사액서원과 5개소의 일반서원에 제향 되었다.

 

공은 대학자요, 철인, 정론가, 교육가, 경세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이기이원론, 인심도심설, 격몽요결, 김시습전, 만언봉사, 시무육조 등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공의 묘는 경기도지정 기념물 15호, 신도비는 파주시지정 문화재 6호, 자운서원은 경기도지정 문화재 45호, 자운서원 묘정비는 도 지정 유형문화재 7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玉山公 (우)

옥산공은 1542년 12세 감찰공 원수(元秀)의 사남으로 1567년 생원이 된 후 1583년 빙고별검 및 교수, 1584년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비안현감, 1589년 상의원 판관, 1592년 괴산군수, 1600년 고부군수를 역임하였다. 1605년 군자감정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09년 5월 27일 별세하니 향년 68세이다.

 

청백리(淸白吏)에 선록되었으며 무동서원,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시(詩)·서(書)·화(畵)·금(琴)을 다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그림은 초충, 사군자, 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 신사임당의 화풍을 따랐다.

 

유작으로는 설중매죽도, 노매도, 수과초충도, 포도도 등이 전하고 있다.


參議公 (국)

참의공은 1555년 14세 참봉공 억련(億蓮)의 아들로 1591년 무과에 급제 후 훈련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시 도원수의 좌익장으로 공을 세워 가선대부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1621년 1월 25일 별세하니 향년 67세이다.


參判公 (정철)

참판공은 1593년 인당공 종윤(宗胤)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0세 풍성군(宜蕃)의 장자 운에 현손에서 절손(絶孫)되어 차자(次子) 재의 후손으로 종손(宗孫)이 되었다.

 

1626년 별세하니 향년 34세 이다.

 

11세 증조인 청곡공 학수(鶴壽), 조부 장죽공 탱, 부친 인당공 종윤(宗胤)에 이어 1733년 효행으로 命 정려되었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護軍公 (명)
호군공은 14세 감역공 성춘(成春)의 아들로 생졸년 등 자세한 기록을 알 수 없다.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여산송씨이다.

北溪公 (목)
북계공은 1589년 10월 27일 14세 송석공 경안(景顔)의 차남으로 삼당숙 종건(宗建)에게 입양되었다.

1613년 생원, 진사가 되었고 1626년 문과에 을과 장원하였으나 취소되었고 창평현령을 역임하였다.

1642년 11월 23일 별세하니 향년 54세이다.

묘소는 광주군 대왕면에 있던 것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 52번지에 이장하였다.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공이 지은 표문과 책문은 선비들이 모범을 삼아서 집집마다 익히고 외웠다. 천성이 고결하여 일찍이 궁달과 득실에 따라 그 뜻이 흔들리지 않았다.

찰방이나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사를 청렴하고 간결하게 처리하여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여 받들었으며, 젊어서부터 담론이 아주 맑아서 지금까지 전파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海豊君 (함)
해풍군은 1470년 10세 풍성군 의번(宜蕃)의 삼남으로 1491년 만주족의 조산보 침공 시, 토벌군 종군 수공으로 수위부의 정략장군이 되고 1505년 건공장군, 1506년 9월 중종 즉위 시 병충분의 정국공신으로 가선대부 해풍군(海豊君)에 봉 해젔고 삭주부사 겸 병마 첨절제사 및 순천부사를 역임 하였고 1529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534년 1월24일 별세하니 향년 65세이며 불천지위가 되었다.

정헌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좌참찬을 증직 받았다.

判書公 (경헌)

판서공은 13세 순천공 통(通)의 넷째 아들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716년 4월 24일 별세하였다.


孝貞公 (경증)

효정공은 1595년 11월 30일 13세 순천공 통(通)의 다섯째 아들로 19세인 1613년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후 1624년 참봉으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처음 전적에 임명되어 1625년 정언, 예조, 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1626년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당시 계운궁 우제 때 부원군 이귀(李貴)와의 의견차이로 파직되었다.

 

1627년 복직되어 전적, 정언, 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왕이 강화로 피란을 가자 어사로호남에 내려가 식량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5, 6년간은 양사의 지평, 헌납, 사간을 지냈으며, 세자시강원에서 사서, 보덕 등을, 홍문관에서는 수찬·응교 등을 여러 차례 거쳤다. 교리 때에는 경천, 휼민, 납간, 용인, 숭검, 돈종, 진학, 형내 등 8조를 진언하여, 광해군 때의 폐풍의 잔해를 쇄신하도록 주장하여 왕이 이를 가납하였다.

 

1632년 12월 검상을 거쳐 사인, 형조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34년 5월 청주목사, 1635년 응교, 첨지가 되었고, 1637년 병자호란 때에는 병방승지로 호종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환도 후 1637년 도승지로 승격하고, 곧이어 병조판서 겸 비변사유사 및 군공청 당상을 맡아 전국의 장사들의 공죄를 잘 조사한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1638년에는 왜인들이 호란을 빙자하여 침구할 기세를 보이므로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뒤에 1639년 7월 병조판서가 되어 원접사로서 용만에 나갔다가 병으로 인하여 정직 하였다가 1641년 예조판서, 1644년 이조판서가 되어 홍무적(洪茂績), 유백증(兪伯曾)등의 질척(疾斥)을 받았으나 왕과 다른 대간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왜인들의 간교함과 민막의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이듬해에 조민(趙珉)이라는 인물을 오용하였기 때문에 찬배되었다.

 

1646년에 이조판서 겸 지중추부사로 시관이 되어 출제한 시제가 시휘에 저촉되었다하여 택당공 식(李植)과 함께 삭출되어 강교에 은거하였고 1648년 5월 17일 별세하였다. 1650년 12월 4일 관작이 회복되었다.

 

1873년 11월 효정(孝靖)이라는 시호를 받다.

 

묘소는 경기 성남시 고등동에 있던 것을 1663년 경기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에 이장하였고 묘정에 신도비가 있다. (용인시 향토유적 46호)


河源君 (심)

하원군은 1472년 10세 풍성군 의번(宜蕃)의 사남으로 1506년 9월 중종 즉위 시 병충분의 정국공신으로 하원군에 봉해졌다.

 

150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처 경흥부사를 역임하였다.

 

1516년 3월 7일 별세하니 향년 45세이며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縣監公 (아)

현감공은 10세 풍성군 의번(宜蕃)의 다섯째 아들로 생졸년 등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현감을 역임하였고 배위는 고성 이씨이다.


承旨公 (의영)
www.duksoolee.or.kr
승지공은 9세 찬성공 추(抽)의 4남으로 출생, 1474년 갑오년(성종 5년) 진사 급제하였으며.

별세 년도는 미상이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그 외 다른 사항은 알지 못한다.

文惠公 (안눌)

문혜공은 1571년 6월 용재공 행(荇)의 손자인 진사 형(泂)의 셋째 아들로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출계되었다.

 

1589년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고, 159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으로 옮겼고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 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1613년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1615년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처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되었다.

 

1617년 예조참의, 1618년 강화부윤이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 후 1623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87년 강도유수. 1631년 형조참판을 거처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633년 예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거쳐 1634년 충청도 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1636년 청백리에 선록되어 효행정문이 세워지고 숭정대부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1637년 3월 29일 별세 후 숭록대부 좌찬성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1663년 10월 9일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효자이면서 청렴 결백한 선비이며 ,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으며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文靖公 (식)
myhome.naver.com/munjunggong

문정공은 1584년 10월 11일 한성 남소문동 외가에서 14세 찬성공 안성(安性)의 아들로 1610년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한 후 1613년 설서가 되었으나 그해 가을 부친이 별세하여 사직하고 부친 묘소를 양동면 백아곡에 모시고, 1615년 조부(涉)의 묘를 이장한 후, 1616년부터 백아곡에 세거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1616년 복직하여 북평사가 되었고 이듬해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백아곡으로 낙향하여 1619년 택풍당(澤風堂)을 (양평군 향토유적 16호)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고조부 용재공이 작성하신 가계와 율곡공, 충무공의 가전세계를 근거로 始祖를 중랑장공(敦守)으로 하는 계보를  확립하고 세계열전을 지었으니 우리문중의 역사는 선생에 의해서 비로소 정리된 것이다.

 

1621년 누차 출사의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정랑, 예조참의, 우참찬, 대사간, 대사성, 충주목사, 간성현감, 대제학, 예조참판,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44년 자헌대부에 올라 이조판서 겸 경연사 4전문형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하고 복상(卜相)에 천거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공이 정3품으로 정2품 판서급으로 임명하는 문형에 올랐음은 조선조 500년 동안에 고조부인 용재공 행(荇)·광주 이덕형 단 3명뿐이니 문명(文名)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646년 예조판서로 문과의 시험관이 되어 출제한 시제에 역의가 있다는 오해를 받아 관직이 삭탈된 후 1647년 6월 13일 별세하니 향년 64세이다.

 

1650년 복관작되었고, 사후 39년인 1686년 선조실록 개수시 광해일기를 수정한 공로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관상감사에 특증 되었다.

 

1708년 여주 기천서원에 배향되고, 1718년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공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으며, 김택영 (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여한 십가문초에 사간원 차자(箚子) 등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각체에 모두 능숙하며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직설적인 것이 많고 고체에 능하였으며 오언율시에 가장 특색을 발휘하였다.

 

문집으로 택당집 외에 저서로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시아대필, 작문모범, 초학자 훈증집, 두시비해 등을 저술하였고, 수성지, 야사초본 등을 편찬하였다.

 

공의 직계후손 중 영의정 두분, 좌의정 한분, 문형 두분, 판서 여섯분, 문과급제 스물두분, 무과급제 열여덟분, 생원진사 예순여덟분을 배출하여 가문의 성세(盛世)를 이루어 벌열(閥閱)에 오르는 초석이 되었다.

 

배위증 정경부인 청송심씨는 현감 심엄(沈掩)의 따님으로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이 백곡공 면하 (冕夏), 차남이 송노당 신하(紳夏), 삼남이 문충공 단하(端夏)이다.


禦侮公 (용)

어모공은 1534년 용재공의 차남인 12세 도사공 원상(元祥)의 둘째아들로 충무위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하였다.

 

1580년 11월 4일 별세하니 향년 47세이다.

 

묘소는 전북 정읍시 북면 남산리 원당마을 산 17번지에 있다.


雨溪公 (광)

우계공은 1541년 12월 12세 도사공 원상(元祥)의 셋째 아들로 1567년 생원이 되고, 157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권지성균관학유, 의정부사록을 거쳐, 1577년 예문관검열이 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뒤 평안병마평사, 1582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정언, 형조좌랑, 예조정랑, 지평에 이어 이듬해 북청판관함경도 도사를 지냈다. 1584년 병조정랑, 장악원정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북도민의 구호현황을 살피고 돌아와서 1585년 영흥부사가 되었다.

 

1586년 길주목사로 나갔다가 같은해 5월 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되었다.

 

1588년 12월18일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89년 2월 충무공 순신을 조방장으로 삼고 11우러 문신으로 선전관을 겸직하고 12월에 정읍현감에 천거하였다.

 

그해 겨울 모역한 정여립(鄭汝立)의 문생과 그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영을 어기고, 혐의가 적은 인물을 임의로 용서하여 풀어 주었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 호조참판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3월1일 지중추부사로서 전라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으며, 5월에 최원(崔遠)에게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목사 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하여 임천을 거쳐 전진하다가 용인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실패하였다.

 

그뒤 다시 전라도로 돌아가서 왜적이 전주, 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도절제사로 삼아 웅치(熊峙)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그 고을 선비 이정란(李廷鸞)과 함께 격퇴시켰다.

 

1592년 8월 1일 용인패전의 책임자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뒤 의금부에 감금되어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 2월 4일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7년 1월 19일 별세하였다.

 

1633년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이 있다.


司議公 (원복)

사의공은 1510년 11세 용재공 행(荇)의 셋째 아들로 상의원 직장을 거처 통훈대부 장례원 사의(司議)를 역임하였다.

 

1567년 2월 14일 별세하니 향년 58세이다.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 용재공 묘 앞에 있다.


生員公 (의연)

생원공은 9세 찬성공 추(抽)의 여섯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나, 생졸년등 인적사항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생원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掌令公 (인궤)

장령공은 5세 양간공 천선(千善)의 차남으로 생졸년 등 다른 인적 사항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장령(掌令)을 역임 하였다.


咸從公 (백복)

함종공은 정정공 변(邊)의 장손인 참의공 거의 장남으로 생원이 된 후 1533년 직장 재임 중 김형경, 정을미 추고에 관여하였다.

 

1555년 형조좌랑 재임 시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 후 통훈대부에 올라 함종현령을 역임하였다.

 

생졸년 등 다른 사항은 알지 못한다.


栗里公 (요신)

율리공은 1542년 11세 덕연부원군 정(貞)의 차남으로 1573년 생원이 되었고 1580년 1월 23일 별세하였다.

 

가선대부 의정부 호조참판 동지 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에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 이다.


忠武公 (순신)
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충무공은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11세 덕연부원군 정(貞)의 삼남으로 1576년 2월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 비보 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 주부에 이어 조산보 만호 겸 녹도둔전 사의가 되었는데,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어 이 책임을 물어 평복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1589년 전라도관찰사 우계공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조방장, 선전관이 되었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의 추천으로 1590년 고사리 첨사(僉使),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를 지내고, 47세인 1591년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7일 최초의 해전인 옥포대첩 승전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5월 29일 노량대첩으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으며, 6월 5일 당항포 대첩 승전으로 자헌대부에 승품되었다. 7월6일 한산대첩 전공으로 정헌대부 승품된 후 9월 1일 부산포 해전으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 하였다.

 

1593년 8월 최초로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시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고 3월 4일 서울로 압송되어,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1597년 4월 1일 죽음 직전에서 우의정 정탁(鄭琢)의 신환상소로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거제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됨으로 패보에 조야가 놀라서 8월 3일 다시 그를 통제사로 기용하게 되었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후 8월 15일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았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 순국(殉國) 하니 향년 54세이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61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命 부조, 命 정려 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홍살문(홍일문 : 紅─門)이 건립되었다.

 

공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判官公 (효종)

판관공은 7세 정정공 변(邊)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나 생졸년 등 다른 인적사항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문과에 급제 하였고 통훈대부 황주판관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 과천시 막계(漠溪)이나 실전되어 서울 봉천동 탑곡 정정공 묘소 우록에 설단 하였다.

 

이 자료는 덕수이씨 사이트에서 복사한 것입니다.